오너 셰프, 전통에 새로운 정면승부를 던지는 승부사, 그리고 전통을 뛰어넘어야 하는 사명. 그들에겐 이런 공통점들이 있다.
“요리 하나로 이런 분과 나란히 키친에서 요리를 하고 대우를 받고 술도 한잔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고 감회가 새로웠어요.” 리옹에서 날아온 <르 파스탕 LE PASSE TEMPS>의 이영훈 셰프는 요리사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간밤에 느꼈던 감동을 이야기했다. 프랑스에서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그것도 미식의 중심지라는 리옹에서 미쉐린 별을 받은 첫 한국인 셰프라는 기록을 가진 그가 이토록 벅차하는 ‘이런 분’은 권우중 셰프다. 간밤인 5월 7일, <권숙수>에서 두 셰프의 요리 공연 같은 컬래버레이션 디너가 있었다. “어제 저도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대부분 단골손님들이 오셨는데 식사 후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와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고마운 입장인데 만든 제게 고맙다 하는 마음속에는 그 요리에 대한 인사가 있는 거겠죠.” 리옹에서 프렌치 요리로 승부를 걸고, 서울에서 한식으로 승부를 거는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이유일까. 딱 봐도 전통과의 정면승부에 뛰어든 뚝심이 만만하지 않은 두 사람. 벌써 이번이 세 번째 컬래버레이션이다.
컬래버레이션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이영훈(이하 이) 2016년 휴가차 서울에 왔을 때 <권숙수>에서 식사를 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한식을 파인 다이닝으로 승부하는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권숙수는 진짜 한식을 베이스로 맛을 조합해내 서양의 파인 다이닝 못지않은 인상을 받았다. 놀랐다. 그러다 작년 부르고뉴의 고성 샤토 클로 드 부조에서 열린 한식 갈라 디너의 게스트 셰프를 우리 두 사람이 맡게 됐다. 그때 권 셰프께서 먼저 서울에서 한 번, 리옹에서 한 번 컬래버레이션을 하자고 제안하셔서 지난 1월 리옹에서 했고 이번에 서울에서 또 하게 됐다.
권우중(이하 권) 문화교류 비영리단체인 ‘우리 문화 세계로(G3C)’의 한상인 대표가 2010년부터 매년 샤토 클로 드 부조에서 한국 문화 홍보를 위해 한식 갈라를 연다. 작년은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의 35개국 유네스코 대사와 부르고뉴 정관계 인사 등 약 1백 명이 참석했다. 이영훈 셰프는 재작년과 작년, 나는 2014년과 작년에 게스트 셰프로 초대받았다.
반응이 어땠나? 특히 호감을 샀던 메뉴는 뭔가?
권 불고기, 비빔밥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의 한식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복합적 풍미를 가진 점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시그너처 메뉴인 무만두가 아주 반응이 좋았다. 사실 매우 한국적인 메뉴다. 피 없는 만두와 잣 수프의 조합. 약간 밋밋할 수 있는 요리인데 호감도가 높아서 나 또한 매우 좋았다.
2년 전 리옹 인터뷰 때, 자신의 요리는 한국적 터치를 가미하는 프렌치가 아니라 그냥 ‘한국인이 만든 프랑스 요리’라고 강조했다. 지금도 그런가?
이 한식적 터치를 일부러 얹어볼까 하고 시도해봤더니 오히려 어설프고 완성도가 떨어졌다. 굳이 시도하려고 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내게서 자연스럽게 묻어날 것이다. 재패니스 프렌치와 맥락이 같다. 리옹에서도 재패니스 프렌치를 한다고 해서 찾아가 먹어보면 그냥 프렌치다. 일부러 일식적인 요소를 넣어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일본적인 요소가 있을 뿐이다. 나 또한 그렇게 코리안 프렌치를 추구한다.
그런가 하면 권우중 셰프는 한식의 본질을 중시한다. 한식의 에센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권 프랑스 요리의 본질이나 한국 요리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똑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나라의 재료와 조리법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 나라 국민이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국 음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니 폭이 넓어지는 게 맞지만, 서양 음식 기반인데 간장으로 맛을 냈다고 한식으로 보는 게 맞을까? 개인적으로는 너무 광범위한 것도 정체성에 혼란이 오지 않나 염려하는 쪽이다. 또한 채소, 장, 김치, 발효가 한식의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목표를 세웠으면 포기하지 말라. 간단하다. 입사할 때 말하던 목표를 못 채우고 포기하는 게 다반사다. 한 번 포기하면 두 번째 포기도 쉬워진다. 포기하지 말자 - 권우중
실제로 사용하는 저장·발효음식들을 모두 직접 만들지 않나. 시행착오는 없었나?
권 외할아버지가 이북 음식을 하던 오너 셰프 같은 분이셨다. 어릴 때부터 김치가 7-8종은 항상 있었고 엄마가 족발, 냉면 같은 음식을 집에서 다 만드셨다. 만드실 때마다 옆에서 보고 물으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 스며든 것 같다. 자연스럽게 익혔기 때문에 레시피의 착오는 없는 편이다. 지금 사용하는 맛내기 레시피도 대체로 10-12년 전의 것 그대로다. 다만 레스토랑에서 쓸 분량을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는 감각에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저장류는 몇 년씩 미리 내다보며 준비해야 하는데, 보통 3년 후를 내다본다.
지금 쓰는 어육간장은 3년 전 담근 것이고 올해 담근 것은 3년 뒤 사용한다. 조금 특별하게 빈티지도 준비 중인데, 사용량의 1/3정도 남겨서 아주 훗날 쓰려고 한다. 예를 들면 2025년에 “이것은 2015년에 담근 간장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투자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을 미리 조금씩 떼어두는 편이다. 현재까지 저장 공간은 가평 산속에 있는 부모님댁을 활용해왔다. 부모님이 가마솥에 끓이는 걸 도와주시는데 이제는 5년 이내에 장소를 서울로 옮겨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지난주 5년 적금을 들었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뭐라도 시작하려는 마음이다. 작년에 이곳으로 이전한 것도 3년 전 적금을 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오너 셰프로 운영하려면 이렇게 단계별 준비를 해야 발전이 가능하다.
요즘 담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권 대 개 장 아찌는 양조간장으로 쉽게 만들고 빠르게 소진하는데 권숙수 역시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조금 더 깊은 맛을 위해서 된장과 고추장을 활용해보고 있다. 사실 고추장 장아찌를 작년에 담갔는데 생각보다 빨리 소진돼서 올해 더 많이 담갔다. 하지만 3년 뒤에야 내놓을 거라 당장은 뭘 써야 할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는 식재료가 있다면?
권 : 봄나물, 들기름.
이 : 꼽는다면 간장. 모든 고기 소스 끓일 때 간장을 조금씩 넣는다.
두 사람 모두 조금은 다른 길을 걸었다. 권우중 셰프는 모던 한식 쟝르를 이끄는 여느 셰프들과 달리 이렇다 할 해외 경력 없이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이영훈 셰프도 클래식 프렌치의 본토로 들어가 폴 보큐즈 요리학교 졸업 후 직접 프렌치로 도전장을 던졌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두 사람. 컬래버레이션 디너에서도 한 수 한 수 바둑을 두듯 각자의
개성 강한 본질적 요리를 내놓았지만 결과는 한 팀이 되어 오목을 놓은 듯 이어져있었다.
권숙수의 주안상이 디너의 문을 열자 한식에서 생선회와 무를 먹듯 도미 타르타르에 홀스래디시 오일과 콜리플라워를 올린 프렌치가 이어지고, 모양도 내용도 유사해 보인 합 요리 2종에서 하나는 지극히 한국적인 맛의 제주 딱새우을 엊은 참게찜이 또 다른 하나는 버터·랍스터 오일·통카빈으로 풍미를 올린 지극히 프렌치다운 맛의 랍스터 요리가 담겨있다. 메인 요리로 가기 전 또 한번의 접점이 나온다. 프렌치는 푸아그라를 선보였고 한식은 전복구이와 감태게살죽을 선보였지만 이번엔 또 그 맛의 기저에 깔린 고급 간장이 경계를 단번에 잇는다.
첫 번째 메인 요리는 숯불에 구운 비둘기. 헤이즐넛 비니거나 모렐버섯까지 사용하며 재료나 테크닉에서 모두 ‘나는 프렌치야’하고 외치는 요리를 내자 탄성을 자아낼만한 황돔솥밥과 바지락 된장국 반상이 ‘나는 한식이지’하며 뒤를 잇는다. 특히 곁들인 찬 중 권우중 셰프가 직접 만든 어육두부장은 향긋하고 화사한 여운이 감돌기까지. 이어 나온 24개월 숙성 콩테 치즈와 숙성 기간이 같다. 이영훈 셰프 또한 콩테 치즈에 뱅존 와인으로 만든 무스와 무화과잼을 더해 평범하지 않은 프렌치 다이닝의 세계로 다시 안내한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리옹과 서울을 잇던 디너는 1년에 10kg만 생산되는 수제 매화차와 한식 디저트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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