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원조를 내건 간판이 너무 쉽게 우리 주변을 에워싸면서 되려 진짜 원조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아이러니.
송영선 할머니가 ‘우리가 시작한 건 아니지’라는 얘기부터 꺼낸 건 아주 의외였고, 그래서 더욱 귀가 기울여진 것도 사실이다.
이동갈빗집은 언제 오픈했나?
36년 전, 상 7개를 놓고 문을 연 게 시작이다. 전 주에서 한식집을 10년 가까이 하던 중, 가짓수 많고 손 많이 가는 일일랑 이제 그만두고 고깃집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여동생의 제안 때문이었다. 당시 동생이 살고 있던 경기도 포천으로 올라 와 둥지를 틀었다.
당시 포천 이동면의 모습은 어땠나?
말도 못했다. 죄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집에 그마저도 폐허에 가까운, 다 쓰러져가는 동네였다. 일동면이 이남에 속했던 데 반해, 이동면은 이북에 속했던 지역이라 세월이 흘렀음에도 차이가 극명했다. 허름한 집들 사이로 갈빗집 두 곳이 희미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고기가 귀한 시절, 포천이 갈비로 이름을 알리게 된 배경이 있나?
군부대가 있으니 당시에는 면회객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손님이나 고깃집 주인장이나 장병들 배불리 먹이려는 생각은 같아 1인분에 갈비를 넉넉하게 내어준 것이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건 등산객들이 다녀가면서부터다.
이동면 앞자락에 드리운 산이 국만봉인데 사철 등산객이 많다. 산정호수의 뛰어난 운치에 가을이면 억새풀이 장관을 이뤄 관광객도 몰리기 시작했다. 놀러 왔다가 우연히 갈비를 맛본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1980년대 후반,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면회객과 등산객 손님이 정말 많다.
이동갈빗집의 흥망성쇠를 봐왔을 것 같다.
인기에 편승하려던 집들은 오래갈 수 없었다. 값싼 공장 갈비(공장에서 나오는 붙임 갈비를 일컫는 말)를 쓰면서 이른바 ‘본드 갈비’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보도되고 포천 이동갈비의 명성에 흠집이 났다.
팔팔 끓던 이동갈비촌 인기가 차게 식는 건 순식간이었다. 간판만 명맥을 유지한 채 주인이 바뀌기도 하고 아예 문을 닫고 나가기도 했다. 예전의명성을 찾기 위해 갈비촌에 남은 가게들은 더욱 더 좋은 고기를 수급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값비싼 소고기에서 갈비 부위만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한우를 썼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처럼 질이 좋지 않았고 수량의 한계도 있었다. 남은 살을 한 번 붙여봤는데, 먹을 수가 없더라.
내가 먹지 못하는 고기를 남한테 돈 받고 팔 수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때 질 좋은 수입육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산 소고기 유통이 활발해지고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더욱 좋은 갈비를 낼 수 있게 됐다. 갈비 다루는 사람이니, 갈비만 두고 얘기하자면 이 부위만큼
은 미국산의 품질이 더욱 안정적이다. 특정 거래처에서 초이스급 갈비를 들여 본살로만 낸다. 30여 년간 지켜온 원칙이다.
전통 포천 이동갈비의 특징은 무엇인가?
뭐니 뭐니 해도 넉넉한 양이다. 갈빗대를 잘라 1인분에 여러 대를 푸짐하게 내는 것으로 아주 옛날에는 6-7대, 정말 많게는 10대까지 잘라내곤 했다는데 지금은 400g 중량의 갈비를 3-4대로 내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지역 갈비와 1인분의 기준 자체가 다르다 보니 정보가 전혀 없는 손님들은 놀라기도 한다. 지금은 손님들이 원하니 생갈비 메뉴도 있지만 본래 포천 이동갈비는 간장 양념 갈비다.
좋은 고기는 기본이고, 이 양념이 갈빗집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집 양념은 단맛이 은은하게 감돌면서 짜지 않게 만들었다. 고기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다.
너무 달면 질려서 먹을 수 없다. 두툼하게 포 뜬 갈비를 이양념에 통째로 담가 3일간 숙성한다. 숙성 기간이 충분한데다, 고기 자체의 마블링이 좋으니 칼집을 낼 필요가 전혀 없다.
포장 손님에게는 흥건한 양념을 절대 버리지 말고 밥을 볶아 먹으라 권한다. 이 양념 비법 물으러 오는 분들이 참 많은데, 오랜 시간 지켜온 비법이라면 비법인지라 알려줄수는 없다.
갈빗집치고 반찬 수가 정말 많다.
본래 이동갈빗집들이 대부분 동치미와 김치 정도를 단출하게 냈는데, 한식 하던 버릇을 남 주지 못하고 하나 둘 찬을 올리다 보니 가짓수가 많아졌다(웃음). 봄에 산에서 곰취를 뜯어다 장아찌를 담그고, 직접 농사 지은 고추는 대대로 내려오는 간장에 3년간 삭혔다가 낸다.
도라지는 향이 중요해 당일 사용할 만큼 손질해 무치고, 파절이도 반드시 손님상에 내기 직전에 무친다. 묵은 김치와 김장할 때 함께 담그는 백김치, 동치미도 우리 집 자랑이다. 가을에 우거지를 거둬들여 1년 내내 된장국도 끓인다.
자연을 상 위에 풀어놓는다는 생각으로 반찬을 만든다. 나이 지긋한 손님들은 ‘옛날 반찬’이라며 좋아들 하신다. 모든 반찬은 고기와의 어울림을 생각해 깊이 있되 깔끔한 맛을 내려고 한다. 묵은 김치를 가만히 보면 무채 양념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김치 속을 만들 때 무채를 모두 갈아 넣었다. 그래야 ‘시원한’ 묵은 김치를 만들 수 있다.
오늘날 포천 이동갈비를 즐기는 모습은 어떻게 변했나?
여전히 가족 단위, 단체 등산객 손님이 많은 가운데 교통이 발달하고 물류 이송이 편리해지면서 택배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우리를 비롯해 많은 집들이 택배 서비스를 하면서 범 지역적인 음식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가정에서 참숯에 갈비를즐기기 어려울 경우 찜으로 해 먹는 방법 등 어디서나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법을 소개하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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