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 질문을 던지면 새로운 전통이 탄생한다. 홍두깨살 외에 다른 부위로 만들면?
간장 외에 다른 장에 재우면? 오랜 지혜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육포는 혼례, 환갑 등 잔칫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신라시대부터 폐백 음식에 포함됐다고 전해지며, 고려시대 문헌 「고려도경」에는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술상에 육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근 결혼 문화의 간소화로 폐백 문화가 없어지면서 육포도 점차 사라 지고 있다. 김지윤 정육포 대표가 폐백 · 이바지 음식 전문가 어머니의 육포를 지키기 위해 현대화를 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육포의 시작은 어머니 김정자 여사의 ‘손맛’이었다. 서촌에서 대대로 살아 온 집안에서 태어나 친정어머니의 서울식 음식을 먹고 자란 김정자 여사는 타 고난 손맛이 좋았다. 어머니의 음식을 떠올리며 남편의 손님을 위해 준비한 상차림은 이내 입소문을 탔고, 그중에는 친정어머니의 전통 방식으로 만든 육포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대물림한 외가의 음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 고자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였던 고 황혜성 선생의 궁중음식 강좌를 이수하던 중 지인들의 부탁으로 선물했던 폐백·이바지 음식이 입소문이 났다. 그렇게 지인들의 부탁으로 시작해 점차 고급 수제 요리가 필요한 친정어머니 들의 주문을 받으며 폐백 · 이바지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차츰 폐백·이바지 문화는 줄어들었지만, 어머니의 육포 주문은 오히려 명절마다 늘어갔다.
김지윤 대표는 남편 박건호 대표와 함께 글로벌 광고 회사 싱가포르 지사에 근무할 시절,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으로 대우받는 비첸향을 보고 어머니의 육포 사업을 떠올리곤 했다. 잠시 일을 쉬기 위해 귀국했을 때, 어머니의 육포를 국내외에 자신 있게 소개할 음식 브랜드로 만들고자 브랜드 ‘정육포’를 론 칭했다.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계기는.
육포는 어머니가 60대 후반에 접어들며 폐백 · 이바지 음식 만들기를 그만두신 후에도 단골 손님의 주문으로 꾸준히 만들어온 대표적 아이템이다.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어머니의 육포가 잊히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워 저와 남편이 현대화해 대를 잇기로 마음먹었다.
선대의 반대는 없었나.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어머니는 오히려 환영하셨다. 국내외에 전통 육포의 진짜 맛을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듣고 기꺼이 정육포의 풀타임 생산자이자 투자자가 되어주셨다. 덕분에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육포를 개량화해 안정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신제품 개발에 활발히 참여하신다.
왜 평창이었나.
육포 맛의 90%는 고기가 좌우하지 않나. 한우 좋기로 유명하다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고기를 테이스팅했는데, 평창 소고기의 육질, 마블링, 향과 맛이 가장 훌륭했다. 어머니의 표현으로는 ‘청년’ 같은 맛이었다. 냉동하지 않은 신선한 한우를 바로 받아 볕 들고, 공기 맑은 환경에서 말릴 수 있다는 점도 주요했다. 현재까지 거래 중인 업체의 한우를 시 험적으로 자연 건조했을 때 은은한 버터와 치즈 향이 나더라. 그 업체도 3대 째 가업을 잇고 있다.
육포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다면.
정육포 공장에서는 6가지 한우 부위로 봄과 가을에 육포를 만든다. 부위마다 커팅법 등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공정은 같다. 먼저 소고기를 찬물에 씻어 핏물을 빼는데, 이때 물기를 잘 빼야 육질 사이로 양념이 잘 배어 든다. 이후 간장, 배즙, 생강즙, 설탕을 활용한 궁중식 양념에 고기를 재웠다가 건조대에 펼쳐 저온에 천천히 말린다. 과거에 바람 좋은 응달에서 채반에 널어 말리던 전통 제조법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 공장 실내 건조 과정으로 현대화한 것이다.
부위와 양념을 다양화한 이유는.
워낙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 ‘덕업일치’로 맛 실험을 하고 있다(웃음). 과거 전통 육포는 폐백이나 차례상에 올리기 위해 소고기 홍두깨살을 결 따라 넓게 포 뜨고 간장을 발라 말렸는데, 꼭 그래야 할까 싶었다. 옛날에야 먹고 남은 부위로 육포를 만들었지만 맛있는 부위를 말리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다른 양념에 재우면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먼저 1+ 등급 이상의 한우 26개 부위를 각 각 간장에 담가 실험한 다음 안심, 채끝, 부채, 홍두깨, 보섭 & 삼각, 꾸리 등 7 개 부위를 제품화했다. 고온에 구워 불투명한 일반적인 육포와 달리, 햇빛과 바람에 말리는 전통 방식과 최대한 비슷하게 저온에 천천히 말려 투명한 반건조 육포다.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만 달리 만든 홍두깨 3종은 비교하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된장은 쿰쿰함 없는 감칠맛이, 고추장은 ‘맵단’이 묘미다. 홍두깨도 결 반대 방향으로 정형했더니 보다 부드럽고 양념이 진하게 뱄다.
이렇듯 저희 부부가 부위와 양념의 다양화를 꾀했다면, 어머니는 홍두깨 부위에 소금, 간장, 고추장, 생강즙 등 각 분야 장인의 식품을 활용해 전통 육포 의 최상급을 지향한 명인명촌 김정자 한우육포를 개발했다. 장인의 손길이 겹겹이 쌓여 전통 육포의 진미를 냈다.
값비싼 부위로 육포를 만들 때 어려움은 없나.
육포는 저렴한 고기로 만든다는 기성세대의 편견은 어려운 숙제다. 게다가 말리면 무게가 1/3로 줄어서 가격에 비해 양이 적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좋은 부위와 부재료로 육포의 프리미엄화를 일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현대화된 육포 생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저희 부부의 아이디어를 어머니가 구현하실 때 옆에서 지켜보며 각 재료의 양 을 계량화했다. 처음에는 기계처럼 정해진 양만큼 재료를 넣어 만드는 과정을 썩 좋아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는 온 · 습도가 유지되는 공장에서 균일한 품질의 육포를 한여름에도 생산할 수 있는점을 반기신다.
기존 제품 외에 반응이 좋았던 신제품은.
한우 보섭 삼각살 전통 간장 맛. 손으로 찢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과 보섭 부위 특유의 달콤함 덕에 어르신부터 어린이까지 즐기는 제품이다. 특히 어르 신들은 구울 필요 없이 간편하게 즐기는 고급 한우 HMR 제품이라는 점을 반 긴다. <소울빌 리스닝바>,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 등 위스키 바나 와인 바에 서는 고기 맛이 진해 페어링용으로 좋은 꾸리살을 선호한다.
정육포의 육포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면.
기름이 충분히 나올 정도로 팬에 1분간 굽거나 전자레인지에 5-10초간 데워 먹으면 지방의 부드러운 질감과 감칠맛이 배가된다. 가열 없이 찢어 먹으면 젤리 같은 쫄깃함과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느껴진다.
대표직을 맡은 후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면.
전통 육포의 소포장화. 일반적으로 전통 육포는 혼례품, 명절 선물용으로 대량 · 대형 포장 판매되지만, 미식 안주나 간식 용도로 40g씩 포장해 접근성을 높였다. 기존 전통 육포가 마트 건어물 섹션에 진열된다면, 정육포의 육포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푸드마켓 고메 치즈 & 샤퀴테리 섹션에서 만날 수 있다.
변화 속에서도 반드시 지키는 기준이 있다면.
음식의 성분표는 짧을수록 좋고, 이름 모를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직접 보고 구매한 한우와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부재료만으로 맛을 낸다. 방부제, 보존제, 화학적 첨가제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해외에 알리고 싶은 욕심은 없나.
정육포를 론칭한 첫해에 세계 각국 주한 대사와 식문화 인플루언서를 초대한 외교부 주관 행사에 한국 대표 푸드 아티스트로서 정육포를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 ‘만국 공통식 육포, 한국 전통 육포로 통하는 세계’라는 주제로 테이스팅 을 선보였는데, 샤퀴테리를 먹고 자라서인지 육포를 익숙하게 여기면서도 장 맛의 새로움에 놀라워했다. 지난 7년간 국내 인지도를 다졌다면, 향후 7년은 해외시장을 개척하려고 한다.
보람을 느끼는 순간을 꼽는다면.
어린이와 외국인의 관심이 특히 뿌듯함을 안겨준다. 몇 해 전 반얀트리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부스를 운영했을 당시 물에 젖은 지폐를 들고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온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솔직한 입맛의 소유자들이 좋아 하니 정육포의 미래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전통 가업을 이어가려는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기존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전통 사업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보수적인 생각이 보수적인 사업을 만든다고 생 각한다. 전통을 지키면서 동시대와 호흡하려는 균형감이 중요하다.
앞으로의 목표는.
정육포가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 전통 육포의 지표가 되는 것. 스페인의 하몽, 싱가포르의 비첸향처럼 육포가 세계인이 즐기는 한식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일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