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누른밥에 물을 부어 속을 달래던 누룽지가 몇 년 전 TV매체를 통해 효능이 소개된 적 있다. 누룽지는 서민이 즐기는 친숙한 식품이기에 ‘누룽지에 무슨 효능이 있겠어?’라고 말하며 과소평가했지만 누룽지는 알칼리식품으로 다이어트, 혈관건강, 소화기능향상, 당뇨예방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재조명받은 누룽지의 수요는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이에 발맞춰 수많은 누룽지 제조업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급격히 늘어난 탓이었을까? 업체들이 가격경쟁을 펼치면서 제품의 가격이 떨어졌고 이는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이후 시장은 포화되고 제조해도 남는 게 없는 레드오션이란 말이 많았으나 ㈜한뜰 정든엄마손맛은 보란 듯이 빠르게 사업 확장을 이루었다. 이번 시간엔 누룽지 제조업체이자 예비사회적기업의 대표인 송지연 대표에게 그 성공비결에 대해 들어보고자 한다. Q :레드오션이라 생각된 누룽지 시장에 후발주자로 들어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던 방법이 궁금하다. A : ㈜한뜰 정든엄마손맛은 타 업체에 비한다면 비교적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제품 경쟁력만큼은 압도적으로 우수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업체들과 차별성을 주고 더욱 높은 수준의 누룽지를 만들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달 ‘기능성원료은행 구축 공모사업’의 사업자로 한국식품산업클러스터진흥원(이하 식품진흥원)을 선정했다. 이에 따라 식품진흥원은 오는 2023년까지 ‘기능성원료은행’을 구축하게 된다. 해당 사업은 기능성식품 원료의 국산화와 올 하반기부터 시행이 법제화된 일반식품의 기능성 표시제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조성을 목적으로 추진된다. 2023년까지 150억 원이 투입되며 기능성식품 원료의 생산, 보관, 공급을 위한 시설을 조성하게 된다. 이후 ‘기능성원료은행’은 ▲ 신규 기능성원료 개발 ▲ 기능성원료 생산·공급 ▲ 기능성원료 산업화 플랫폼 구축 ▲ 기능성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정보 제공 기능을 수행할 예정이다. 또한 기능성원료은행은 국산 기능성식품 원료 활용 촉진과 안정적 공급을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건강기능식품 시장규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에 반해 기능성식품 원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기능성원료은행이 도입되면 이를 통해 원료 수입대체 효과를 볼 수 있다. 아울러 국내 수요에 맞춰 원료를 차질 없이 공급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며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여간다는 전략도 세울 수 있다. 식품진흥원
성공적인 외식 창업을 위해 이제 온라인 마케팅은 필수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 매장에서의 고객 반응뿐만 아니라 포털사이트, 블로그, 인스타그램, 배달앱 등을 통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가 매출과 즉결된다. 온라인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든 자영업자가 공감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온라인 시장을 방치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에 외식마케팅 전문 회사 ‘스튜’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를 위해 ‘온라인에서 보여지는 내 점포 점검받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스튜의 임찬민 대표와 만나 외식마케팅 전문 회사를 차리게 된 과정과 이번 프로그램 기획 취지에 대해 들어봤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임 대표는 학창 시절부터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의 책을 읽고 요약해서 가지고 다닐 정도로 외식 경영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어머니가 운영하는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다 다음해 성균관대 프랜차이즈 CEO과정을 수강하며 본격적인 외식업의 길로 들어섰다. 프랜차이즈 CEO과정을 마치고 국내 최초 외식컨설팅기업 알지엠컨설팅에 입사해 외식 컨설턴트로 일할 기회를 가졌다. 외식컨설팅 회사에서 수많은 유망 프랜차이즈 시스템 구축, 성남시 부진점포
서울 연남동의 유명 중식당 ‘진가(陳家)’를 운영하는 진생용 셰프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중식대가이다. 방송에서 중식 사대문파 사부로 소개되고, 유통기업의 중식 밀키트 상품개발에도 참여한 그에게도 40년 배움의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주방 막내 시절에는 겨울에도 찬물로 식재료를 손질하다보니 손등이 마침 생선 도미껍질처럼 트기 일쑤였다고 한다. 연남동 골목에 위치한 중식당 진가를 찾아 진생용 셰프의 성장 이야기와 그만의 중식 철학을 들어봤다. 칼판 잡던 주방 막내에서 특급호텔 주방장이 되기까지 화교 출신인 진생용 셰프는 어릴 때부터 강원도 영월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연스럽게 중식을 접하게 됐다. 9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진 셰프는 대학진학 대신 요리사의 길을 선택했다. “20살 무렵 당시 남산에 있던 국빈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가 허드렛일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식을 배우기 위해선 면 삶기, 전표 읽어주기에 이어 칼판을 잡는 것이 시작이다. 재료를 손질하는 6번째 칼판으로 일하다 지인 추천으로 82년 프라자호텔(현 더 플라자)에 입사하게 된다.” 10년 정도 호텔에서 경력을 쌓으며 칼판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중식 요리를
매혹적인 커피 향에 이끌려 도착한 오스트리아. 그곳에서 바리스타 전 대위는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기술보다 더욱 큰 것, 카페를 생활의 일부로 여기는 커피 문화와 커피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바리스타의 태도를 배웠다. 그윽하고 풍성한 커피 아로마와 닮은, 향기 있는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그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유럽의 카페를 꿈꾸다 고등학생 시절, 취미로 커피를 배우기 시작한 아버지 덕에 매일 아침 집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그 당시 커피는 내게 그저 쓰게만 느껴지는 음료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쓴맛이 묘한 매력의 맛과 향으로 바뀌어갔고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커피의 매력에 푹 빠진 뒤였다. 그래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되리라 결심했다. 고등학교 위탁 교육을 통해 제과, 제빵, 그리고 커피를 배우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 후 스무 살에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사 예절부터 서비스까지 하나하나 배워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군대에서 재미 있는 친구를 만났다. 바로 요리사 정재호다. 나는 커피에 대한 열정이 큰 것처럼 그는 요리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우리는 군 생활 내내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의 집'은 1957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궁중한정식, 전통 한식을 선보이는 곳으로 현재 한국문화재단이 운영 중이다. 품격 있는 한식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어 서울의 주요 관광지로 꼽힌다. 유명곤 조리수석은 궁중음식보급팀 소속으로 한국의 집에서 한식을 책임지는 이 중 한명이다. 30년 넘는 시간동안 한식 쉐프로 지켜 온 그만의 음식 철학과 성장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호텔 조리사로 일하며 청와대 국빈만찬 참여 70~80년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국기업이 중동 건설붐을 일으킬 때였다. 유명곤 세프도 자격증을 취득해 해외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기점으로 특급호텔에서 한식조리사를 찾는 수요가 늘며 코리아나호텔에 조리사로 들어가게 된다. “아시안게임, 올림픽...연이은 국제대회로 국내경기가 호황이었다. 호텔 한식당에서는 일할 조리사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식 중에서도 주로 소갈비와 냉면 파트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이후 프라자 호텔 아사달의 First Cook(요리장)을 거쳐 조선호텔 한식부분 팀장으로 7년간 근무했다.” 근무하는 동안 청와대 국빈만찬 행사에도 몇 차례 참
얼마 전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해 큰 주목을 받았던 한 외식업체가 최근 논란에 둘러싸였다. 해당 업체의 사장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몇 개월간의 노력으로 ‘덮죽’ 메뉴를 개발 백종원 대표의 극찬을 받았다. 요리에 대한 전문지식 없이 홀로 노력해 멋진 메뉴를 만들어 낸 사장은 눈물을 흘렸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SNS 상에 해당 업체의 사장의 ‘눈물의 호소’가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호소의 주 내용은 ‘자신의 레시피와 메뉴 명을 그대로 따라한 프랜차이즈 업체가 나타났다’는 것. 이 후발업체는 상표권까지 신청해 더욱 뻔뻔하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는 곧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언론의 집중포화와 국민들의 불매운동이 이어지자 결국 후발업체 대표는 사과문을 올리고 모든 사업을 철수했다. 그러나 해당 후발업체의 대표가 이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타 업체의 사업 아이템을 모방해왔음이 드러나며, 상표권과 레시피에 대한 특허 인정 등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이 커지고 있다. 레시피는 특허가 불가능? 잘못 알려진 사실! 덮죽 사건이후, 많은 매체들이 조리법 관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고급 일식당 ‘아오야마’는 서울 청담동에서 20년간 지역 명소로 자리를 지켜왔다. 오랜 시간 아오야마에서 정통 일본요리 카이세키(會席)를 책임진 이는 바로 40년 일식 외길인생을 걸어온 박범순 쉐프다. 박 쉐프는 97년 아오야마를 창업한 대표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아오야마 문을 닫고 현재는 전국을 다니며 일식당 메뉴 자문, 컨설팅을 하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주방일, 평생 업이 되다 1975년 만으로 18살이 된 청년 박범순에게 꿈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울 데판야키(철판구이)&샤브샤브 전문점에 주방보조로 들어가 일을 배우며 외식업에 첫발을 디뎠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친 환경에서 선배들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웠다. 10년 정도 호텔, 일식당을 거치면서 실력을 쌓아온 박 쉐프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기회를 맞게 된다. 당시 외식 시장이 커지며 서울 강남 일대에 전문 일식당이 대거 들어서며 일식 전문 쉐프의 몸값이 높아진 것이다. 일식당에 근무하는 동안 견문을 넓히고 전문성을 강화하고자 틈틈이 일본 연수를 떠나 카이세키 요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까지 공유경제는 세계적인 빅 트렌드였다. 공유경제라는 낯선 개념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에어비앤비, 우버, Wework 등의 공유 경제를 활용한 사업들이 한국에 잇따라 상륙했다. 이어 공유경제는 스마트한 소비생활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과 맞물려 쉽게 대세로 자리 잡았다. 여행을 가면 호텔, 리조트를 잡기보다 에어비앤비로 개성 있는 숙소를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하는 것이 흐름이 됐고, 소카 등 공유 자동차 서비스 역시 일상이 됐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예상 못한 변수가 생기며 이러한 공유경제에 제동이 걸렸다. 바깥 활동이 제한되고 방역에 대한 우려가 더해지며 숙소, 차량 등을 공유하는 형태의 서비스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공유경제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공유주방’ 만큼은 그 성장세에 가속이 붙었다. 외식이 줄고 배달이 늘면서 공유주방을 이용해 배달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업체들이 대거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로드샵의 경우 임대료와 권리금 등의 자본금이 필요한데 반해 공유주방은 그런 초기 자본에 대한 부담이 적어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국에도 창업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더해졌다. 공유주방이란 무엇인가? 공유
서울 송파구 8호선 문정역은 법조타운을 중심으로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가 모여 있는 오피스 상권이다. 문정역 3번 출구(현재 4번 출구 공사로 인해 폐쇄)로 나와 가락시장역 방면으로 조금만 걷다 보면 서양식 펍 느낌의 치킨집 ‘꽂따(ggotdda)’가 눈에 띈다. 꽂따를 운영하는 박순신 대표는 93년부터 13년간 비비큐(BBQ)에서 근무한 후 다수의 치킨 브랜드 기획 및 런칭에 참여해 온 치킨마스터다. 아직 세상에는 없는 치킨을 선보이겠다는 생각으로 수년간 준비를 거쳐 올해 9월 꽂따 매장을 오픈했다. 한국 치킨 시장 성장기 함께 보낸 치킨마스터 88서울올림픽은 세대의 전환점이라 불리며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미식이라는 표현도 생소하던 외식시장 역시 요리사가 유망 직업으로 주목받으며 성장기를 맞게 된다. 88학번으로 대학을 다니던 박 대표는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동안 기자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세계 각국의 음식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요리와 관련된 전공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학습 환경이 좋았던 건 아니다. 좋은 기회로 올림픽에 자원봉사를 나가 다양한 세계 음식을 맛 볼 수 있었고 조리법, 식재료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이후 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