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세계에 ‘파격을 위한 파격’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반드시 미각적으로 기쁨을 줘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낯선 향신료를 새롭게 맥락화하는 러스틱 퀴진 <에피스>, 마시는 행위의 개념을 바닥부터 흔드는 <라운지 희움>, ‘이노베이션’을 통해 손님을 행복에 젖게 하는 <강별 성수>모두 파격적이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부글거리는 실험실 같은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파격과 조화 사이에서 길을 찾아내는 균형감각이다.
익숙한 듯 새로운 러스틱 퀴진, <에피스>
지난 6월 역삼에 오픈한 <에피스>는 <로마옥>, <음음>, <위트앤미트> 총괄 셰프를 역임한 김형진이 오너로서 운영하는 첫 번째 업장이다. 점심 메뉴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러피언 브런치’를, 저녁은 ‘와인 다이닝’을 지향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요리라도 시간대에 따라 가격과 구성이 다른 이유다. 프랑스어로 ‘향신료’를 의미하는 업장명처럼, <에피스>의 다채로운 메뉴가 주는 여러 가지 즐거움은 결국 두가지로 정리된다.
이국적 향신료의 매력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리고 한국의 친숙한 향신료를 ‘재발견’하는 즐거움. 예컨대 깻잎 페스토 아란치니는 우리네 깻잎 속에 감춰져 있던 이탈리아적인 매력을 들춰낸다. <에피스>가 표방하는 ‘러스틱 퀴진’은 김도현 셰프가 호주와 캐나다에서 요리 경력을 쌓으며 깊은 인상을 받은 비스트로
혹은 캐주얼 다이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깻잎, 고추를 비롯해 직접 재배한 작물을 사용하는 점이나, 나무와 돌의 색채와 질감을 모던하게 표현한 인테리어도 확실히 ‘러스틱’하다. 유럽이 떠오르는 ‘성당 뷰’는 <에피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특별함이다.
<에피스>의 비프 타르타르에는 입안을 환기시키는 새콤한 무언가가 있다. 거킨이나 케이퍼는 아닌 생소한 재료다. 과연 무엇일까? 바로 묵은지다.
외가에서 수급한 방앗간 참기름의 진한 향과 어우러지는 비프 타르타르속 묵은지는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참기름의 고소한 맛을 강화하고, 바삭한 식감을 더해주는 보리칩은 농부인 지인이 직접 추수한 검정보리를 갈아 만든 크래커다. 벽돌치킨은 한 입 썰어 입에 넣으면, 처음에는 맛의 순서를 따라가게 되고, 끝에는 종합적으로 음미하게 된다.
입안에서 레바논식 ‘툼 소스’의 마늘 맛이 진정되면, 닭고기의 그릴 향이 선명해진다. 파프리카, 커민, 마늘 러브에 마리네이드한 다음, 팬에 굽고 오븐에 익히고 그릴에 다시 한 번 구워 살려낸 향이다. 여기에 고추, 땅콩, 커민 크럼블이 씹히면서 나오는 향과 고수 샐러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이 더해지고, 이모든 것을 툼 소스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감싼다.
- 에피스
-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81길 26 1층
파인 드링크 오마카세, <라운지 희움>
<라운지 희움>은 지난 8월 역삼동에 문을 연 ‘하이엔드 파인 드링크 오마카세’다. 음료를 제공하는 공간은 맞지만, 그저 목을 축이면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은 아니다. 알지 못했던 감각을 건드리는 경험을 통해, 평범한 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곳이다.
19세기 기차역 모티프를 과감하게 재해석한 인테리어 또한 설렘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대미술 작가인 김지희 대표의 스튜디오 2층에 자리한 있는 업장은 이름에서부터 작가 활동과 관계성을 드러낸다.
‘움’은 잉태의 공간인 자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시그너처 메뉴 ‘아트 브루 오마카세’는 김지희 대표의 미술 언어를 파인 드링크로 번역한다는 점에서도, 도슨트 설명을 곁들인다는 점에서도 미술과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운지 희움>은 회화, 퍼포먼스, 음료 개발이 결합된 다원 예술처럼 보인다. ‘마시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제시한다는 소개 문구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 아트 브루 오마카세
첫 메뉴 ‘이터널 골든’부터 신선한 충격을 준다. 차가운 그라니타와 따뜻한 티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라니타는 시트러스한 과일 맛과 일본 깻잎의 알싸한 풀 내음의 조화가 매력적인 슬러시다.
티는 재스민과 캐모마일 블렌딩에 살짝 더한 피나무꿀의 꽃 향이 인상적이다. 두 음료는 따로 즐겨도 좋고 칵테일처럼 섞어도 좋다. 두 번째 메뉴 ‘실드 스마일’은 논알코올 아이리시 커피다.
맨 위의 크림층은 생강즙을 첨가해 화사한 느낌이 들고, 중간 더치커피층은 묵직하다. 밑바닥에 깔린 리프레셔층은 로즈메리를 인퓨징한 레몬즙으로, 잔을 비울 때 개운함을 준다.
마지막인 ‘더 팬시 스피릿’은 시나몬 스틱 훈연의 묵직하고 스모키한 향과 음료 자체의 산뜻함이 흥미롭게 대비된다. 사과와 오렌지를 착즙한 베이스에 고수 씨를 비롯해 네 가지 허브와 향신료가 가미되어 약간의 산미와 함께 여운이 깊어진다.
- 라운지희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18길 15-5 201호
행복을 연구하는 다이닝 바, <강별 성수>
지난 8월 이탤리언 이노베이티브 퀴진 <강별 성수>가 등장했다. ‘한강에 누워 바라봤던 별, 불어오던 바람, 그 순간의 행복’을 축약한 업장명은 손님의 소중한 하루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
‘손님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진심으로 고민하는가’가 직원 채용 기준일 정도다.
밀라노와 스페인에서 공부한 박재범 셰프, 청담 파인 다이닝에서 경력을 쌓은 세 명의 공동대표 강대현, 이영, 서상원, 그리고 멜버른 출신 가르드망제 신해온이 의기투합하여 운영하는 <강별 성수>는 무엇보다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다이닝’을 지향한다.
인테리어 콘셉트를 ‘집들이’, 혹은 ‘거실과 주방이 있는 아늑한 가정집’으로 삼고 ‘한식 터치가 들어간 이탤리언 요리’를 표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어링 선택지에 맥주와 와인, 유자 칵테일, 탁주뿐 아니라 시그너처 논알코올 음료 ‘강별 우유’, ‘에스프레소 바질샷’도 있어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한다.
■ 치킨 스테이크 & 제철 생선 룰라드
라벤더는 닭고기에 향긋함을 더해줄 뿐 아니라 식감에도 작용하는 듯하다. 닭고기의 사르르 녹는 식감은 라벤더에 하루 동안 숙성시켜 얻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닭 가슴살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조리 과정은 팬프라잉으로 시작해서 버터에 라벤더 향을 입혀 아로제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한다.
제주 구좌 당근, 창녕 미니 양파의 단맛이 감칠맛을 강조하고, 체리세이지는 산뜻한 향을 더한다. 열흘간 우린 돼지뼈를 숙성해서 얻은 포크쥐 소스도 꼭 맛봐야 할 별미다. 감태에 돌돌 만 삼치는 흡사 날생선처럼 보이지만 오렌지 산으로 익힌 것이다. 남미의 생선회인 세비체와 유사한 기법을 독자적으로 재해석했다.
식감은 회보다는 조금 더부드럽고 맛은 생선 고유의 담백함에 상큼한 산미를 입혔다. 일식 기법으로 만든 히비스커스 식초에 절인 엔다이브, 막걸리로 만든 뵈르블랑은 <강별 성수>의 ‘이노베이티브’한 면모를 거듭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히 당귀 오일과 삼치의 만남은 각별히 혁신적으로 느껴진다.
- 강별 성수
- 서울특별시 성동구 뚝섬로9길 8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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