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면 술집 처마 끝에 매달린 둥그런 조형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삼나무로 만들어진 스기타마(杉玉)이다. 술을 짜기 시작할 땐 초록빛을 띄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어두운 갈색으로 변한다. 술의 신에게 주조, 장사의 번영의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색의 변화로 일본에선 술의 숙성 정도를 확인한다.
청담역 8번 출구를 지나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스기타마가 걸린 작은 사케바가 있다.
앉을 자리는 나란히 늘어진 8석이 전부다. 얼핏 심야식당이 떠오르는 이 가게를 지키는 주인은 오원탁 대표(33세)다.
고교 자퇴 후 게임개발자로 사회 첫발
오 대표는 사실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17살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IT 업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카카오, 넥슨 등 굵직한 기업에서 게임 기획자로 일해 왔다. 주로 신규 프로젝트에 참여해 경력을 쌓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즐겨 웹툰도 그려보고, 카이스트 학내에 있는 벤처 회사에 잠시 근무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10년 넘게 기획자로 일하며 받는 중압감, 스트레스도 컸다. 20대 후반 외식업을 하던 부모님 가게에서 장사를 배우며 전혀 다른 삶으로 뛰어들었다.
오 대표의 부모님은 같은 건물에서 일식 돈가스 전문점 ‘카츠로우’를 운영하고 있다. 장사 경력만 20년이 넘은 베테랑이다. 청담동 유명 맛집인 이곳에서 오 대표는 4년 전부터 부모님 밑에서 음식을 배웠다.
주인은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가게의 주인은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오 대표가 어머니에게 배운 음식점 경영 철학이다. 어릴 때부터 돈가스집 아들로 자라며 곁에서 본 것이 있어서 곧잘 적응해 나갔다. 돈가스 조리방법부터 고객 응대, 물류 관리 등을 순차 적으로 배워나갔다.
일을 배우며 오 대표는 요리가 얼마나 정성이 많이 필요한지 깨달았다. 튀김의 맛이 의외로 날씨 등 외부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름 온도, 달걀 농도 감을 잡는데 두 달 정도 시간이 걸렸다.
우연히 들른 히메지에서 사케에 취하다.
카츠로우에서 일한 지 3년쯤 지났을 무렵 친하게 지내던 일본 지인에게 히메지 지역 사케 투어를 추천받았다. 일본 효고현에 위치한 히메지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히메지성 외에 한국 사람에게 인지도가 높은 지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진 ‘나다키구’ 양조장 외에 수많은 니혼슈(일본술)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사케 문화가 발달했다. 애주가 사이에선 사케 체험지로 각광 받는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던 오 대표는 친구와 함께 히메지로 떠났다.
일본 술 고향이라 불리는 동네답게 어딜 가도 특색있는 사케를 찾아볼 수 있었다. 400종류가 넘는 사케를 마셔볼 수 있는 바(bar) ‘코코로미’에서 오 대표는 나마자케(生酒)의 매력에 취해버렸다. 2박 3일 동안 하루에 30종류 이상의 술을 마셨다. 나마자케란 출시할 때 열처리를 하지 않아 효모가 살아 있는 채로 출하하는 술이다.
한국에 없던 정통 사케바, 스키타마 by 카츠로우
나마자케를 즐기는 일본 문화에 매료된 오 대표는 두 달 뒤 히메지를 다시 방문했다. 지난번과 다른 컨셉의 매장을 다니며 벤치마킹을 할 요소를 확인했다. 한국에 돌아와 카츠로우가 있는 같은 건물 1층에 자리가 나온 걸 알고 일단 가게를 계약했다.
사케바를 하고 싶단 마음이 앞서 가게를 얻었지만 아직 장사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니었다. 처음 오픈했을 땐 나마자카게 8종류가 사케 메뉴의 전부였다. 지금은 약 80종 이상의 나마자케를 취급하고 있다. 한국에서 나마자케를 취급하는 곳 중 가장 많은 숫자다. 이곳은 고객들이 흔히 찾는 소주, 맥주는 판매하지 않는다. 가게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오 대표는 오직 나마자케로 승부를 보고 있다.
나마자케는 5도 이하의 저온 냉장고에서 보관해야 맛을 유지할 수 있다. 발효주이기 때문에 상온에 보관하면 맛이 금방 변한다. 국내에는 필요한 저온냉장고 제품을 찾기 힘들어서 수소문을 통해 어렵게 미국제 제품을 구해서 사용하고 있다.
안주는 크림치즈와 슈토(다랑어 젓갈), 고마(깨) 두부, 카모(오리) 소바, 하치마츠 우메보시 등 한국에서 보기 힘든 일본식 위주이다. 메뉴 개발을 위해 인터넷 검색, 중고책을 뒤져가며 요리를 개발했다.
매주 새로운 술이 들어오기 때문에 처음부터 별도로 메뉴판을 만들지 않았다. 고객이 오면 취향을 물어보고 순서에 맞춰 사케를 추천한다. 맛이 진하거나 도수가 강한 순서로 각자 어울릴만한 술 종류를 권해준다.
자신이 맛있다고 인정한 사케만 취급
스기타마는 병이 아닌 잔으로만 사케를 판다. 손님들에게 자신이 겪은 것처럼 다양한 사케를 음미하며 즐기는 음주 문화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가격은 한잔에 7천 원 ~ 1만 2천 원 사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손님에게 줘야 한다.’ 생각해 직접 마셔보고 검증한 사케만 들여놓는다.
오 대표가 사케를 고르는 원칙은 무로카나마겐슈(無濾過生原酒)이다. 무여과이며 물을 타지 않은 그대로 원주로써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맛을 압축한 술이다. 주종에 따라 멜론, 참외, 매실, 청사과 등 과일 향이 난다.
스기타마는 월요일를 제외하고 매일 새벽 두시까지 영업을 한다. 체력적으로 지칠 법 하나 오 대표는 게임을 기획해 만든다는 기분으로 재밌게 장사를 한다고 말했다. 장사 시간도 자신의 라이프사이클에 맞춰 짰다.
“장사와 콘텐츠 기획은 기본적으로 같다. 하나의 아이템을 정해 제작하고, 고객에게 서비스 하는 점에서 닮았다. 혼자서 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적어 부담도 그만큼 덜하다. 일본에서 느낀 것처럼 스키타마를 동네주민이 편하게 찾아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로컬바로 만들고 싶다. 친한 단골 손님들과는 함께 일본 여행도 종종 간다. 지난달에는 후쿠오카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마자케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장사가 될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에 앉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꾸준히 온다. 우연히 들른 히메지에서 맛본 사케의 매력에 끌려 창업을 한 오 대표. 지금 가게 앞 스기타마(杉玉)는 늘 좋은 술이 준비돼 있다며 갈색 빛깔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