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한때 왕의 집이었던 경복궁을 감싸고 있는 8개의 산이 있다. 수도 방어의 역할과 함께 조선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이 산들은, 특히 4월에 원경을 감상하기 제격인 곳이다. 굳이 말하자면 ‘서멍’하기 좋은 스폿. 그리고 김서윤 바텐더가 추천하는 바에서 산기운 그윽한 칵테일 한 잔을 마신다면 이보다 더 괜찮은 ‘봄놀이’가 또 있을까?
칵테일로 그려낸 진경산수화, 공간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의 모티프가 된 인왕산은 서울시가 선정한 ‘사색의 공간’일 뿐 아니라, 야간 산행지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한 인왕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감고당길 골목 어귀,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바 <공간 GONG GAN>을 만날 수 있다. 바 한가운데 중정이 위치해 운치 있는 이곳은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글귀를 내걸고, 인왕산 등산 후 방문한 손님들에게 푸짐한 인심으로 칵테일을 추천해준다.
첫 잔 ‘레토 LETO’는 팝콘을 인퓨징한 보드카와 라임, 국산 배 슈럽이 들어간 칵테일이었다. 슈럽(SHRUB)이란 칵테일에 넣는 달콤한 식초 시럽으로, 과일주스나 허브, 향신료 등을 배합해 다양한 조합으로 활용된다.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슈럽이 킥이 되어 탄산감이 없는데도 등산 후의 갈증을 싹 해소해주는 느낌이었다. 가니시로 올린 바삭한 배 칩은 슈럽을 만들고 남은 배를 활용한 것이라고.
두 번째 잔은 진달래를 뜻하는 ‘아젤리아(AZALEA)’였다. 벌집을 수비드한 정원 진과 스파클링 와인, 레몬 오일을 활용한 코디얼이 들어가는데, 마치 어린 시절 길가에 핀 진달래꽃의 꿀을 빨아 먹는 듯한 기분이었다.
함께 플레이팅된 크림치즈와 벌집 가니시를 곁들여 먹으니 맛의 레이어가 더욱 다채롭게 느껴졌다.
마지막 잔은 ‘슬로우 페이스’ 칵테일이었다. 영어로 ‘느린 걸음’을 뜻하는 명칭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공간>으로 걸어오라’는 뜻을 담았다.
오미자가 품은 다섯 가지 맛과 카카오의 달콤쌉싸름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가볍고 상큼한 피니시는 마치 산들바람 같았다. 함께 나온 오미자 가루를 묻힌 청포도 밀크 초콜릿은 흡사 디저트를 페어링한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고요한 산자락 아래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으니 문득 윤동주 시인의 ‘산림’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 하잔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 천년 오랜 연륜에 짜든 유적한 산림이 / 고달픈 한 몸을 포옹한 인연을 가졌나 보다.” 햇볕 좋은 날, 인왕산 산행 후 시집 하나 챙겨 <공간>에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도심 한복판의 비밀 정원 같은 이곳에서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은 칵테일 한잔을 마신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겠다.
한국적 팝아트 같은 칵테일, 기슭
한국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북한산 자락, 주택가 골목을 파고들어가면 바 <기슭>이 모습을 드러낸다. 친정집처럼 포근한 접객과 더불어 서울에 있는 바 중 흔치 않게 새벽 5시까지 운영해 업계에선 ‘퇴근 후 한잔하고 싶은 바텐더들의 성지’라 불린다. 업장명에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는데, ‘산의 비탈진 아랫부분’을 뜻하는 국문명은 낮은 곳에서 산을 바라볼 때의 안정감이 좋아 지었다고.
입맞춤 KISS이 연상되는 영문명에는 악수, 포옹, 입맞춤이 자연스러울 만큼 스스럼없는 바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마침 메뉴판도 3가지 스킨십을 주제로 나뉘어 있어 주제별 칵테일 추천을 요청했다.
‘악수’와 어울리는 첫 메뉴는 칵테일 ‘가리발디’. 이 칵테일은 이탈리아 북부의 대표적인 리큐어인 캄파리와 남부 시칠리아산 오렌지를 혼합한 것이 시초였는데, 이것이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상징한다고 하여 통일의 주역인 주세페 가리발디(GUISEPPE GARIBALDI)장군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주문하자마자 생오렌지를 착즙해 만든 덕분에 자연스레 오렌지 폼이 형성되어 쌉싸름한 캄파리의 맛을 부드럽게 바꿔주었다. 마치 신선한 당근주스를 마시는 것 같았다.
‘포옹’과 어울리는 메뉴는 ‘에스프레소 마티니’로,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코냑과 아마로, 커피 리큐어, 라즈베리, 비트를 더했다. 쌉싸름한 커피부터 부드러운 크레마 폼, 달콤하고 스파이시한 베리가 어우러져 따뜻한 포옹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백년초 가루로 로고 모양을 표현한 가니시에선 재치까지 엿보였다.
마지막 ‘입맞춤’ 테마의 칵테일은 <기슭>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미도리 사워’. 멜론 리큐어, 아일레이 위스키, 라임, 달걀흰자를 넣은 이 칵테일은 부드러운 질감과 멜론의 달콤함을 음미할 때쯤 스모키한 향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때 가니시로 올린 짭짤한 프로슈토 칩을 먹으면 꼭 입맞춤처럼 ‘단짠’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조림 깡통이나 콜라병을 소재 삼아 예술을 한층 쉽게 풀어냈다. 이곳 또한 클래식한 레시피에 약간의 위트를 더해 재해석해내는데, 추억 속 슬러시를 칵테일로 풀어내는가 하면, 불량식품을 바 스낵으로 내오는 식이다. 먼 훗날 한국적 팝아트의 어느 카테고리에 <기슭>의 이름이 자리 잡고 있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